블랙파이어가 들려주는 신화에 따르면, 그는 고담이라는 도시가 잊어버린 존재. 도시의 기원에 위치해있던 존재다. 그는 고담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설파하며, 도시의 하층민, 노숙자, 정신병자, 중독자 등 시스템에서 탈락한 이들을 모아 자신만의 "새로운 질서"로 도시를 재탄생시키려 한다. 그의 이상은 얼핏 아름답고 숭고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다. 배제된 자들을 구원하는 척하면서 뒤에선 그들을 도구로 삼아 희생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고문과 환각과 반복적인 주입 속에서 무너지고 마는 배트맨고문의 흔적은 학습되고 계승된다블랙파이어의 연설, 환호하는 시민들. 폭력으로 얼룩지는 거리현실에서도 이는 반복된다. 억압을 견딘 사람들이 다음 세대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계승할 때, 고통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언어가 되고 질서가 된다.고문은 끝났지만, 고문의 성과(?)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브루스 웨인은 깊고 깊은 내면의 계단을 내려가 자신의 무의식 속 닫힌 문에서 조커를 만난다. 이 이야기는 브루스 웨인의 무의식 속 조커, 그리고 고담이라는 도시의 무의식 속 광기를 대비하여 현대 사회를 성찰하게 한다.질서를 위해서?이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고통을 다시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 복종이 아닌 연대의 언어. 지금 필요한 건 로빈이다. 이름을 불러주는 존재, 꺼내줄 사람. 지금도 어떤 이는 쇠사슬에 묶인 채 누군가의 신화에 빠져들어 있다.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악몽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 채 말이다.블랙파이어의 수법은 이렇다. 우선 종교적 신화를 반복적으로 들려준다. 그 이야기 속에 블랙파이어가 숭배를 받고 사람들을 이끌 정당성이 충분하게 부여된다. 블랙파이어의 방식과 논리 또한 신화적으로 포장된다. 배트맨은 고통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주위 사람들 모두 블랙파이어를 신으로 숭배한다. 그러니 배트맨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나만 이런가?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인가?'그래서 블랙파이어는 다시 돌아온다. 새로운 얼굴, 새로운 구호, 새로운 질서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돌아온다. 그는 자신이 구원자라고 말하고, 우리는 다시 그의 말에 환호한다.자신들이 도구이자 희생양인 줄 모르는 채, 지지자들은 블랙파이어를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그의 지시 아래서 안정을 느낀다. 그가 지시하는 대로 폭력을 수행했더니 도시의 범죄자들이 사라지고, 거리가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쓰레기처럼 버려진 이들을 거둬들이고, 범죄자를 학살하며, 눈에 보이는 '질서'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고통 속에 안정을 원한 시민들은 그것을 안식으로 느낀 것이다.배트맨은 어떻게 돌아오는가누가 먼저 문을 열어줄 것인가, 뭐라고 말해줄 것인가.디컨 블랙파이어는 사실 고담이라는 도시가 축적해온 죄의 총체이자, 지워진 기억과 외면된 역사, 그리고 도시가 만들어낸 무의식의 실체다. 원주민 샤먼이라는 정체성은 고담이 잊어버린 ‘처음의 주인’을 상징하는데, 이는 단순한 문화적 장치가 아니라 문명이 덮어버린 폭력의 흔적을 고발하는 장치다.돌아온 배트맨은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됐다.예전엔 폭력을 쓰던 배트맨이었지만, 이제는 폭력을 먼저 의심하는 존재가 되었고, 과거에는 그저 범죄에 얼룩진 밤거리를 통제하는 자였다면, 이제는 회복을 상징하는 존재로 변모했다.배트맨에게 조커가 있다면 고담에는 블랙파이어라고 하는 무의식이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고문 속에 브루스 웨인이 무의식의 계단을 내려가 조커를 대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문이 열리며 조커가 돌아오듯 블랙 파이어도 돌아와 복수를 감행한다.'배트맨, 나는 너야! 너는 원래 나여야 했어!''라고 하듯, '이 땅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어!'라고 하면서. 그들은 둘 다 우리의 내면에서 태어나는 괴물, 우리가 외면한 채 살아가는 진실이고, 폭력을 넘어 회복으로 가려면 이 진실을 건너야 한다.배트맨의 무의식과 도시의 무의식그런데, 고담 시민 중 절반은 블랙파이어 지지자다. 그들은 배트맨이 없어도 아쉬워하지 않는다.배트맨은 고통 속에 복종하고, 사람들은 폭력을 통한 질서 회복에 환호한다. 대체 왜?누군가는 여전히 하수구 아래에서 고통의 이유를 듣고 있고, 누군가는 자신이 왜 아픈지도 모른 채, 누군가가 들려주는 신화를 믿는다. 믿는 게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고, 믿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된다.고담이 세워지던 때, 순교자요 피해자로 그려진 샤먼 블랙파이어. 고문 속에 블랙파이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야기가 계속 주입된다.고문의 고통은 배트맨의 내면을 붕괴시킨다. 고통은 학습으로 이어지고, 반복된 학습은 대물림된다.작품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배트맨이 블랙파이어의 신념을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약에 취한 채 블랙파이어와 함께 범죄자를 응징하는데 동참하고,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장면. 그냥 세뇌가 아니다. 고통과 고립 속에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현실을 재구성하고, 가해자의 언어를 채택하는 모습이다."배트맨 : 컬트(Batman: The Cult)"배트맨을 찾아온 로빈. 회복 후 블랙파이어와의 대결에서 총을 쓰길 거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