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주)인포스텍
로그인 회원가입
  • 고객지원
  • A/S문의
  • 고객지원

    A/S문의

    사우디- 세번째 외화벌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HELLO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회   작성일Date 25-05-21 15:41

    본문

    1984.6-1988,10
    두번째 분당룸싸롱 외화벌이를 84년 2월 에 끝내고 사우디에서 귀국하여 삼일로에 있는 삼일빌딩 본사에 출근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의 직위도 과장으로 승진해 있었고 (83년에 경남기업 최연소 과장으로 승진)
    보잘것 없지만 당시 31세의 당찬내힘으로 방배동에 조그마한 아파트도장만하였고 (83년 )
    아이들도 제법커서 큰애가 초딩 4학년 막내가 유치원에 다니고 있어서 사는 재미가 쏠쏠 하였다.
    몇년간의 외화 벌이 덕에 집도 있도 돈도 조금의 여유도 있고 무었보다 집안의 가전제품인 비디오,오디오 가
    외국산 일품에다 그당시에는 분당룸싸롱 방송국에서나 있을법한 비디오 카메라 도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주말을 즐기는 것이 아주 재미 있었다. 내가 출근하면 동네 아줌씨들이 우리집에 모여 영화와 음악을 즐기며 죽방 쳤고
    장인,장모님은 시골 저 멀리서 비디오 구경하러 우리집에 오셨고
    집안 대소사를 직접 촬영하여 같이보며 한껏 호사를 한것같다.

    헌데 국내생활을 한 3개월 하다보니 국내 봉급은 쥐꼬리만 하고 노는것이 영 시시해졌다.
    해외생활 할때는 휴가오면 일식집에서 저녁먹고 룸싸롱도 가고 하였는데 국내 봉급으로는 언감생신이었다.
    퇴근하면 분당룸싸롱 몇몇 친구와 동래파전에 소주 두어명 먹고, 다른유형은 파무침에 삼겹살, 또 다른유형 치킨에 생맥주 두어잔 정도로
    술타령을 하였고2차도 못가고 집으로 향하니 영 따분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당시회사는 사정이 악화되어 해외수주한 공사를 타회사에 넘기고 봉급은항상 한,두달 밀려 나왔다.
    나야 벌어논것이 조금은 있었으니 걱정이 없었지만 국내생활만 한 동료들은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해 6월
    당시 가수 유주용씨가 우리회사 해외수주 담당으로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공사
    디랍하우징 프로젝트를 3억 6천만불에 수주를 하여 분당룸싸롱 착공 중이었는데 해외근무를 자청하여 3번째
    외화벌이를 하고자 1984년 8월 4일 사우디 디랍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의 규모는 부지가 세로 약 2킬로 가로 약 4 킬로 되는곳에
    사병빌라 3000 동 , 장교빌라 150 동 국민학교 8동 중학교 3동 ,교회 4개, 병원 1동 소방서 1동, 주유소 1동,
    경찰서 1동 상수도 시설 1동 하수도 시설 1동 이었으며 요즈음으로 말하면 분당 신도시 하나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기술부에 속해 분당룸싸롱 있으면서 기계설비에 속해있는 모든 기자재를감독관 측으로 부터
    승인을 받는것이였다.

    열거하자면

    1. 일반 설비자재
    &nbsp배관재. 욕실자재, 냉난방자재. 등등

    2.키친자재
    &nbsp대형주방 설비자재, 가스설비.

    3. 병원설비
    &nbsp병원 기자재.

    4. 소방설비
    &nbsp불자동차 4대.지휘차량 1대 구급차량 1대

    5. 주유소 설비
    &nbsp주유설비및 세차설비 1식

    6. 수영장 설비
    &nbsp수영장및 연못 설비

    좌우지간&nbsp그때 84년부터 88년 까지 그곳에서 행한 일이 내생에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찾이하였고
    그다음 부터는 이것을 응용하며 살아온 것이 된다.
    나의 숙소는 독방에 마주한 독방 동료와 화장실을 같이 쓴 분당룸싸롱 화장실 동기인 과장숙소에 배당이 되었다.
    그동료는 나보다 한 4-5살 더먹었는데 96년 인가? 당뇨로 작고 하였지만 꽤 재미있는 생활을 하였다.

    1. 주중생활즐기기
    &nbsp아침 4시30분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먹으러 식당으로
    항상 일착으로 보는얼굴 연세가 지긋하신 장비를 맡고계신 김과장님
    장국에 밥한술 말아먹고 사과한쪽 씹으며 출근 씩스 투 씩스 의 생활이 시작된다
    이곳 사우디는 한낮에는 40도가 넘으니 점심시간을 2시간정도로 길게 잡고 식사후 오침을 즐긴다.
    이곳 현지인들은 두번째 쌀라(무슬렘식 기도)를 하고 분당룸싸롱 세번째 쌀라까지가 점심시간이니(11:30~3:30)
    혹곡한 사막기후에서 살아가는 일종의 생존방식일것이라 생각한다.
    제일먼저 찾는곳이 테렉스 실 직원만 약 300명되니 내것은 내가 챙기어야 한다.
    그때의 통신상황은현장에 전화가 외부선은 약 5대 직원간의 통화는 내선으로 하였으며
    한국에있는 가족과의 전화는 간부들을 제외하고 전부 교환실에서 한달에 약 5분만 무료 통화였고
    그것을 넘으면 개인 변상이었다
    그때의 내 과장봉급이 한 80만원 되었는데 집안에 큰 일이라도 터지면 한시간 통화면 약 20만원 정도가 들었다
    그때의 대통령봉급이 한 분당룸싸롱 120 만원 이었나?
    하여튼 해외봉급생활 하는것은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볼수 있었다.
    일과후 저녁을 먹고 직원들과 공갈맥주(무슬렘사회에는 일절 술을 금하기때문 맥주는 있으나 알콜도수가 없음)
    내기 테니스 시합을 한 두어시간하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후 옆방동료와 와인한잔 따르며 이러쿵 저러쿵
    상사 씹기에서부터 후배 길들이기. 음담패설, 신세한탄, 제 자랑 --- --- 등등등
    항상 걸쭉한 입담좋은 동료가 인기였었다.
    그때의 동료들 서너명은 아직도 월1회정도 만나며 옛일 회상하며 술자리를 즐긴다




    -To be continue-



    London 출장에서 한컷


    분당룸싸롱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