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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악 칼럼] 한국 모험의 아이콘, 박철암 선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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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ajfoooo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회   작성일Date 25-05-2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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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악 칼럼] 한국 모험의 아이콘, 박철암 선생의 ‘커밍아웃’1962년 등반 중 구릉에 올라 찍은 사진. 박철암 선생은 이를 6,700m 무명봉의 '등정' 사진으로 소개했다.히말라야 등정 시비는 국내 산악계의 오랜 주제다. 1970년 네팔의 추렌히말(7,371m) 등정 시비를 필두로 잊을 만하면 터지곤 했다. 고산등반 열기가 가라앉은 요즘도 현재 진행형이다. 필자도 그런 문제를 지적해 왔다. 월간山 칼럼을 통해서도 몇 차례 썼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근거와 당위가 충분하다 해도 실명을 거론하며 쓴소리 하기는 불편하다. 실제로 여러 번 거센 비난으로 되받아야 했다. 손해 본 일도 없는데 필자는 왜 걸고넘어지려 했을까. 서로 엇갈린 내용의 보고서 최근의 화근은 본지 1월호 칼럼(한국 산악계의 고질적 거짓말, '정상 올랐다')에서 비롯됐다. 칼럼은 이런 내용이다. 한국 최초 히말라야 원정대였던 1962년 고故박철암 선생(1918~2016)의 경희대 다울라기리 탐사대부터 허위 등정 보고가 시작돼 숱하게 반복되었으며, 그것은 등반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기업·소속 집단이 등정자를 영웅시하면서 이득을 취해 왔던 구조 때문이고, 따라서 등반의 결과보다 과정에 주목하는 산악계 공론장이 숙성돼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칼럼이 나간 뒤, 박철암 선생 관련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쪽 사람들이 필자의 칼럼으로 인해 분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두 명이 필자 집 앞까지 찾아와 밤늦은 시각 카페에 앉아 격론을 벌이기까지 했다. 필자는 칼럼에서 박 선생이 2010년대 와서야 1962년 당시 정상에 오르지 못했음을 밝혀서 '커밍아웃'했다고 썼다. 이들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맞섰다. 1962년 원정의 공식 목적은 '다울라기리 2봉(7,751m) 등반을 위한 진입로를 찾기 위한 정찰'이었다. 그런데 원정대는 인근에 있던 '6,700m의 무명봉(이름 없는 산)'도 등반했다. 이듬해 박 선생이 집필·출간한 보고서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군의 탐사기(1963)>에 당시 등반 과정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이렇게 얼마를 반복하였는지 갑자기 시야가 터졌다. 나는 20발자국을 더 셀 필요가 없었다. 정상에(6,700m의 피크) 올라선 것이다. 무한한 감격과 피로가 겹쳐 나는 그[산악 칼럼] 한국 모험의 아이콘, 박철암 선생의 ‘커밍아웃’1962년 등반 중 구릉에 올라 찍은 사진. 박철암 선생은 이를 6,700m 무명봉의 '등정' 사진으로 소개했다.히말라야 등정 시비는 국내 산악계의 오랜 주제다. 1970년 네팔의 추렌히말(7,371m) 등정 시비를 필두로 잊을 만하면 터지곤 했다. 고산등반 열기가 가라앉은 요즘도 현재 진행형이다. 필자도 그런 문제를 지적해 왔다. 월간山 칼럼을 통해서도 몇 차례 썼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근거와 당위가 충분하다 해도 실명을 거론하며 쓴소리 하기는 불편하다. 실제로 여러 번 거센 비난으로 되받아야 했다. 손해 본 일도 없는데 필자는 왜 걸고넘어지려 했을까. 서로 엇갈린 내용의 보고서 최근의 화근은 본지 1월호 칼럼(한국 산악계의 고질적 거짓말, '정상 올랐다')에서 비롯됐다. 칼럼은 이런 내용이다. 한국 최초 히말라야 원정대였던 1962년 고故박철암 선생(1918~2016)의 경희대 다울라기리 탐사대부터 허위 등정 보고가 시작돼 숱하게 반복되었으며, 그것은 등반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기업·소속 집단이 등정자를 영웅시하면서 이득을 취해 왔던 구조 때문이고, 따라서 등반의 결과보다 과정에 주목하는 산악계 공론장이 숙성돼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칼럼이 나간 뒤, 박철암 선생 관련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쪽 사람들이 필자의 칼럼으로 인해 분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두 명이 필자 집 앞까지 찾아와 밤늦은 시각 카페에 앉아 격론을 벌이기까지 했다. 필자는 칼럼에서 박 선생이 2010년대 와서야 1962년 당시 정상에 오르지 못했음을 밝혀서 '커밍아웃'했다고 썼다. 이들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맞섰다. 1962년 원정의 공식 목적은 '다울라기리 2봉(7,751m) 등반을 위한 진입로를 찾기 위한 정찰'이었다. 그런데 원정대는 인근에 있던 '6,700m의 무명봉(이름 없는 산)'도 등반했다. 이듬해 박 선생이 집필·출간한 보고서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군의 탐사기(1963)>에 당시 등반 과정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이렇게 얼마를 반복하였는지 갑자기 시야가 터졌다. 나는 20발자국을 더 셀 필요가 없었다. 정상에(6,700m의 피크) 올라선 것이다. 무한한 감격과 피로가 겹쳐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다음에는 송대원과 셰르파가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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